Chapter 1
히나가타리
이즈미 교카
히나(雛, 히나마쓰리 인형) — 부부 한 쌍을 이룬 메오토비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벚꽃히나, 버들히나, 유채히나, 복숭아꽃히나, 흰빛과 진홍, 보랏빛 제비꽃히나. 시골에는 쇠뜨기·민들레로 빚은 풀히나. 우산을 함께 받친 봄비히나. 잔물결 가벼이 소맷자락으로 노 저어 가는 아사즈마부네 가락의 히나. 고닌바야시(악사 다섯), 관녀들. 다만 그 친히키(狆引, 강아지 끄는 시동) 하나만은 모양도 품격도 없으니 차라리 없어도 좋으련만. 종이히나, 시마히나, 콩알히나, 한 푼짜리 히나, 헤아릴수록 어여쁘고 사랑스럽다.
검은 선반(黒棚), 미즈시(御廚子), 삼단(三棚)의 그 우람함은, 우리 같은 시정의 히나단에는 다소 격이 높을 듯도 하다. 작은 옷장, 나가모치(長持, 긴 궤), 핫소바코(挟箱, 짐상자), 황금빛 마키에, 은빛 쇠장식. 새끼손가락만 한 서랍을 당겨 열면, 안쪽이 다홍빛인 것조차 곱다. 한 쌍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군데군데 녹다 만 눈 위 어린 솔에 단정한 학과 새끼 학. 다른 한 폭은 곡수(曲水)의 군청빛에 복숭아 술잔, 본보리(雪洞, 종이 등롱)는 복사꽃 같은 등불을 켠다. …… 곁들여 정취 있는 부채 한 자루.
시로자케(白酒, 단 백주)를 담은 것은 기야망(ぎやまん, 유리)에 버들과 벚꽃을 비치는 무늬. 그래, 안주에는 무엇이 좋을꼬, 전복이 좋을까, 소라가 좋을까, 갯고둥이 좋을까 하니, 소라와 대합이 노래가 되어 그릇 가에 떠올라 온다. 백어도 좋고, 작은 도미도 좋고, 다홍 융단에 어울리는 것으로는 버들가자미가 있다. 나리히라 가막조개, 고마치 새우, 이히다코까지도 밉지 않다. 어느 것이든 작을수록 사랑스럽고, 그릇 또한 작을수록 정취가 있어, 그 도미와 가자미가 늘어선 자리는, 히나단 깊은 곳이 그대로 용궁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여보세요, 어디서 본 히나란 말이세요.)
아니, 사실 예닐곱 살 무렵에 본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어머니의 히나를 떠올리노라면, 아득한 용궁의 환영처럼 느껴져 견딜 수가 없다.
고향도, 산 너머 멀다.
아무래도 값나가는 물건은 아닐 터이나, 다홍 실로 밑을 묶은 장난감 술잔이며, 곤페이토를 담은 단지 하나조차도, 말에 안고 가마에 끌어안아 먼 길을 에도에서 가져왔다 생각하면, 종이상자에 든 난징 모래마저 히나 앞에서는 홍옥이 되고 녹주(緑珠)가 되고, 모두 다 부드러운 비단을 두른 옥구슬이 된다.
북쪽 고장의 삼월은 아직 눈이 녹지 않으므로, 셋쿠는 사월에 했던 모양이다. 겨울 칩거의 창이 열리고, 처마와 추녀의 눈가림이 걷히면, 북풍이 굉굉히 울려 퍼지던 거친 바다의 파도 소리도 봄바람의 음색으로 바뀌어, 매화·벚꽃·동백·황매화, 복숭아도 자두도 일제히 피어나, 여인들의 눈썹과 입술, 옷자락 여덟 자락의 빛깔까지 모두 꽃처럼 살포시 핀다. 하고이타도 데마리도 이 무렵부터다. 하여 깃털 공의 소리, 데마리의 소리, 노랫소리들.
…… 떨어뜨려 받아내며, 옷깃 모양 소매 모양, 고운 손에, 나비야…… 꽃이여. ……
이러한 때에, 버들·벚꽃·진홍 복숭아 핀 골목길을, 화창한 햇볕에 천천히 지나노라면, 안개를 물들인 햇빛 속에서 어디에선지 모르게 히나의 그림자, 인형의 그림자가 어른어른……
으스름한 달밤이면 치맛자락의 다홍, 소맷자락의 연두가 빛깔로 드러나 노닐 것이다.
— 어느새 오히나사마(お雛様)가 서두르신다.
하며 좁은 단의 다홍 융단. 여기서 오동 상자도 정겨운 듯 끌어안듯 들고 나와, 손가락 뚜껑을 스르르 빼면, 요시노 종이의 안갯속에서 오히나사마와 오히나사마가, 홍매·백매의 얼굴로 어렴풋이 떠올라, 입가에 곱게 미소 지으신다. 그저 바라보며, 흐뭇한 듯 무릎에 모셔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황금의 관에는 자줏빛 끈, 옥비녀에는 다홍 끈을 매어 드리던 그때, 그 젊은 어머니의 그때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효도라도 잘하면 좋으련만 —
쥐 보초나 서고 있을 일인가. 그저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 볶은 콩 냄새에 콧방울을 벌름거리고, 모란 모양 아루헤이토(有平糖, 엿사탕)를 노리는 양은 독을 머금은 호접(胡蝶)을 닮았으니, 서서 받든 관녀의 자루를 빼어 들다가 꾸중을 듣고, 악사의 시에보시(侍烏帽子)를 콩 하고 두드렸다가 또 꾸중을 듣는다.
여기 작은 당초 무늬 마키에 수레가 있었다. 같은 마키에 받침에서 떼어 내어, 채는 그대로 두고 뒤에서 밀면 살짝 삐걱거리며 융단 위를 미끄러진다. 만개한 벚나무 가지를 따라 흐르는 듯하고, 다홍 안개의 물결을 노 젓는 듯도 하다. …… 그리고 그 살짝 삐걱거리는 소리는, 아련히 기리리, 하고 일종의 미묘한 음악이었다. 사이좋은 작은 새가 부리를 맞댈 때, 잇몸이 막 돋는 어린아이가 가루떡을 카리리 깨물 때, 귀를 기울이면 문득 이런 소리가 나지 않을까 싶은 — 이야기는 다르지만 (사랑스러운 것)으로서 (살결 흰 아이가 딸기를 베어 문 모습) — 마쿠라노소시(枕草子)는 얄미운 말을 하였다.
초라하기 마련인 줄기 데친 무침이며, 분홍 파의 누타(ぬた) 무침도 마키에 그릇 안에. 흔하디흔한 가막조개조차 히나 앞에 나아가면 검은빛 비단 겉옷에 옅푸른 깃이다. 바다의 것, 산의 것. 죽순의 살결도 미소년이다. 어느 것이나 먹을거리라기보다, “채소 잎에 머무르렴 나비야” 시구와 한가지로, 야요이 봄날의 벗으로 보인다. ……
소매 모양 압화(押絵) 세공의 젓가락 받침에서, 은으로 만든 작은 술병에 이르기까지, 호사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작은 도미는 가시가 많고, 버들가자미의 진수성찬을 떠올리노라면, 아 — 술과 담배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
기카쿠(其角)의 하이쿠가 있다. — 감질나구나 히나 앞에 작은 잔.
그 시로자케를 입술에 살짝 댄 그 자리는, 젖내라도 나지 않을까 싶은 …… 살짝 말이외다.
— 사양 말고 따라요.
하며, 벌컥벌컥 들이켰다가는 말이 안 된다.
가나오카(金岡)의 싸리꽃 그림 속 말이며, 히다(飛騨) 장인의 용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전등을 끄고 본보리의 그늘에서 우러러뵈는 히나의 얼굴은, 실로, 가만히 바라보면 눈을 깜빡이고, 이윽고 살포시 미소 짓는다. 짓궂은 관녀가 슬쩍 곁눈으로 보는 모습도 있다. — 히나단 아래에 누워 있으면 히나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어릴 적 들었던 그 말을 나는 지금도 의심하고 싶지 않다.
하여, 온 집안이 잠들면, 어디 한구석 작은 병풍이, 학의 깃 위에 복사꽃을 깔고 스스럼없이 한 바퀴 돌지도 모를 일이다. …… 그 정겨움을 헤아리면, 히나단에 인형이 너무 많이 들어차 있는 것은 정취가 없으리라.
다만, 많거나 적거나 간에, 지금 나는 히나다운 것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어머니가 애지중지하시던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마을에 큰불이 나서 모두 타버렸다. 한번 들고 나갔다고도 들었으나, 혼란통에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그토록 마음을 기울이셨던 분이니, 아마도 예의 그 수레에 올라 히나들도 불을 면하였으리라,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 후 이러한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다시 십이삼 년이 지난 뒤이다.
즈시(逗子)에 머물던 시절, 시즈오카 마을 풍경이 보고 싶어, 삼월 한가운데였던가 싶다, 한차례 그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센겐 신사(浅間神社)에서 솥에 단술을 끓여 파는 찻집에 쉴 때, 비둘기와 더불어 양지바른 곳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노파가 들려주었다. 아베강(阿部川) 하천부지에서는 벚꽃 철이면 그곳 사람들이 다홍 융단에 찬합 음식을 차리고 꽃놀이 술자리를 벌인다고. — 아베강 길을 물었던 차였다. — 도카이도 노래로도 이곳을 후추(府中)라 익혔던 처지로, 시즈오카에 와서 아베가와모치(阿部川餅)를 모르고서는 면목이 없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를 어떤 우스개의 별명이라 여기시면 곤란하다. 분명, 콩가루를 묻힌 떡이다.
시즈하타산(賤機山), 센겐을 휩쓸어 내리는 바람이 거센 추운 날이었다. 적막한 무가 마을을 빠져나가기도, 큰 강의 둑길을 따라 걷기도 하면서 아베강 다리목으로 나와, 인력거는 떡집 한 채로 들어섰다.
살결 희고 다홍 반깃을 단, 사람 됨됨이 좋아 뵈는 시마다(島田) 머리의 처녀가 가게에 홀로 있었다.
— 이것이 그 이름난 아베가와모치인가, 한 쟁반 주오. —
하며 짐짓 기타하치(喜多八)의 흥을 띄워, 가게 앞에 내어놓은 유리문 안에 차려진, 다섯 개쯤 담아 놓은 다홍 쟁반에 불쑥 손을 내미니, 처녀가 “어머나” 하고 말했다.
— 어머나, 그건 진열용이에요 —
참, 진짜 그대로의 히자쿠리게(膝栗毛) 노릇을 한답시고, 흥취랍시고 띄운 것이 도가 지나친 모양새다. 한데, 여기서 곧장 한 입 베어 물고, 술병 손놀림으로 자작하여 들이켠 모양만은 스스로도 듬직하다.
문득 잠깐 뒷간을 빌려 쓰고 싶어졌다.
중간 미닫이를 열고, 토방을 따라 안으로 쭉 들어가시라는 처녀의 일러줌에 따라, 낡고 큼지막한 그 미닫이를 열었다. 묘한 구조여서, 곧바로 벽이 나오고, 벽의 창을 통해 건너편 토방의 부엌이 들여다보이면서, 굴을 빠져나가듯 직각으로 한 번 굽었다가, 어두운 곳을 슬쩍 빠져나오니, 마루턱에 가장자리를 두른, 깜짝 놀랄 만큼 널찍한 안방이었다. 큼지막한 화로가 패어 있었다. 굉장한 것이, 다이묘의 한 행렬쯤은 너끈히 쉴 만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어둑한, 낡은 다다미. 적적하니 인기척이 없다. …… 고양이도 없다. 화로에 불기운도 없고, 다관(茶釜)도 보이지 않는다.
멀리서 안쪽 우물의 물이 바닥으로 울려 똑, 하고 떨어졌다. 이상하리만큼 바람이 멎고 적막했다.
올려다본 박풍구(破風口)는 고개만큼 높아, 멍하니 들녘으로 나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루를 따라 가운데 토방을, 화롯가 앞을 지나 저쪽으로 건너가니, 복숭아와 벚꽃이 환히 빛나듯이, 다섯 단 일면의 다홍 융단, 이윽고 네 첩 반의 방을 가득 채운 히나, 인형들 무리.
문득 그 차려진 모양도 자태도, 옛 고향의 히나를 빼닮았다, 싶었더니, 어느 얼굴이나 고향의 그것보다 푸르스름하게 창백하고, 옷도 관도 옛 히나의 두 곱쯤 되는 크기였다.
어둑한 한낮의 그림자가 하나하나에 모두 비친다.
뒤편의 낡은 후스마(襖)가 반쯤 열려, 안쪽으로도 또 하나 보이는 작은 좌식방에, 또 다섯 단의 히나가 있다. 신기하구나, 마키에 수레, 히나들도 그야말로 한 치 다르지 않게 옛 고향의 그것을 빼닮았구나, 싶어 저도 모르게 몸을 길게 빼며 내다보다 문득 마음을 차리니, 앞쪽 히나단에 모셔진 이들이 어느 하나 예사로운 모양이 아니다. 히나는 두 분이 서로 마주 보고, 관녀들은 옆얼굴을, 또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악사들은 빙 둘러앉아, 북의 가락줄을 죄었다 풀었다 하고, 어전 화로 앞은 그대로 무대 뒤편 광경이다.
나는 깜짝 놀라 뛰어 물러섰다.
문턱 밖, 이끼 낀 안쪽 우물에는 방금 길어 올린 듯한 두레박의 물방울. — 뒤뜰은 복숭아도 그저 가지뿐, 노랗게 핀 것은 개나리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살그머니 지나가니, 아무 일도 없다. 후스마 안쪽에 히나는 없고, 앞단의 히나도 시에보시 하나 자리가 바뀐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 이때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바람은 그대로 멎어 있다. 너른 하천부지에 안개가 흘렀다. 건너가면 마리코(鞠子) 숙장이라 들었으니…… 매화와 풋나물의 시구로도 들리는 곳이다. 조금만 건너가 보자 싶었다. 다리목, 그 큰 버들의 가지가 사르륵 옅푸른 빛으로 늘어진 아래를 지나니, 나무뿌리에 한 장, 다홍 융단을 깔고 네 귀퉁이를 고운 강돌로 눌러 두었다. 히나 시장이 서는 모양인데, 조개 짝 맞추기 놀이의 조개 한 짝, 사람 하나 없다. 그저 두세 마장 봄 한낮에, 인적이 한 사람도 없다. 어쩐지 꺼려져, 손을 대어 보지도 않았다. 다홍 융단은, 어느 곳에선가 비치는 좌식방에서 버들 가지 끝에 거꾸로 비친 히나단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꿈을 꾸는 듯한 마음으로 다리에 들어서니, 이 또한 흰 무지개가 다가와 군청빛 물을 마시는 듯하였다. 어이쿠 참새가 날듯이, 융단 누름돌 끝의 자갈이 또르륵 또르륵 굴러가더니, 부드러운 바람이 융단을 말아 올려, 사뿐사뿐 버들의 늘어진 가지에 휘감겼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불을 떠올렸다.
어디에선지 모를 곳에서, 기리리 기리리 채를 굴리는 수레의 울림.
마리코는 안개에 잠긴 긴 다리, 아베강의 다리 널을 이쪽저쪽, 아른아른 아지랑이가 노닐고 있다.
그때 푸른 하늘에 후지(富士)를 보았다.
젊은 처녀에게 행복이 깃들기를 빌며, 떡집 앞을 지나치면서,
— 이보게, 어여쁜 처녀로구먼, 좋은 사윗감을 맞춰 주고 싶네 —
— 예에, 떡집 사위는 모르겠습니다만, 길 건너 저 긴 흙벽, 저 보십시오, 버드나무 곁의 뒷문이 있는 저 댁은…… 나리, 큰 재산가시지요. 바로 얼마 전, 도쿄에서 그렇게도 그렇게도 어여쁜 사모님이 오셨답니다 —
참으로 이런 때는, 보지 못한 사랑에도 마음이 들떠 그리워지는 법이다.
탐나는 것은 — 만약에 가능하다면 — 니세무라사키(偐紫)의 겐지비나(源氏雛), 자태도 구니사다(国貞)의 니시키에(錦絵)만큼이나 빼어난, 하나기리(花桐)를 첫째로, 후지노카타(藤の方), 무라사키(紫), 다소가레(黄昏), 가쓰라기(桂木). 가쓰라기는 모두가 아는 오보로즈키요(朧月夜)의 별명이다.
비추지도 않고 흐려지지도 않는 봄밤의……
이 대목쯤은 다소 취한 듯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