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독서팔경(読書八境)
이치지마 슌조(市島春城)
옛말에 “거처는 기질을 바꾼다”고 했거니와, 거처에 따라 심기(心氣)가 달라지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독서 역시 처한 경지(境)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지니, 이는 주로 기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백주에 다망한 가운데 읽는 것과 심야 인적이 고요해진 뒤에 읽는 것은 다르고, 황진만장(黃塵萬丈)의 번잡 속에서 읽는 것과 임천유수(林泉幽邃)의 그윽한 곳에서 읽는 것은 저절로 맛이 달라진다. 바쁜 중에 읽어 아무 감흥도 없던 것을 한가로운 때에 읽어 깊은 감흥을 얻기도 하고, 득의(得意)의 시절에 통쾌하게 읽던 것을 실의(失意)의 때에 다시 읽으면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의 심기는 처한 경우에 따라 달라질 뿐 아니라, 사계와 아침저녁, 계절과 시각이 바뀌면 같을 수 없다. 독서의 맛도 따라서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경지에 따라 서미(書味)가 달라지는 것을 헤아려 여덟 가지 목을 가려 뽑아, 이를 독서팔경이라 이름한다.
一 기려(羈旅)
二 취후(醉後)
三 상중(喪中)
四 유수(幽囚)
五 진중(陣中)
六 병욕(病蓐)
七 승원(僧院)
八 임천(林泉)
(一) 기려는 주차객관(舟車客館), 곧 배와 수레와 여관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다. 여러 동반자가 있는 경우나 지극히 가까운 거리의 여행은 별론으로 하고, 대체로 여정 중에는 침묵이 이어진다. 무료(無聊)하고 달랠 길 없는 시간이다. 조용히 서책에 친숙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때가 아니겠는가. 여행 중에 많은 책을 지니고 다닐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 행리(行李)에 담을 수 있는 것은 겨우 두세 권에 불과하다. 서재에서는 수많은 서책이 사방을 에워싸 마음이 흩어져 한 책에 오롯이 집중하기 어렵지만, 여행 중 벗이 되는 서책은 한두 권에 지나지 않으니 정독이 가능하다. 완미(玩味)도 할 수 있다. 수십 시간에 걸친 기차 안에서, 수십 일에 걸친 선중(船中)에서, 수 주간을 머무는 여관에서, 경경고독(煢煢孤獨)하여 오직 벗으로 삼을 것은 서권(書卷) 외에 없으니, 평소 경솔히 속독하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지나쳤을 것을 이 경우에는 크게 얻는 바가 있다. 평생 잊기 어려운 깊은 인상도 이때에 새겨진다.
(二) 취후는 정신이 흥분해 있으므로, 침착한 사람이라도 거칠고 호방해진다. 세심하게 숙독할 때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회심(會心)의 책을 읽어 감흥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때다. 중국의 주객(酒客)들은 “이소(離騷)”를 읽으며 흥취를 즐긴다고 하거니와, “이소”가 아니더라도 시편(詩篇)은 대체로 취후의 좋은 벗이다. 역사를 읽으며 고금의 치란(治亂)을 더듬는 것도 또 하나의 흥취요, 규방(閨房)의 서적도 아마 취해 누운 때에 어울릴 것이다. 취후는 정신이 활발히 움직여 온갖 생각이 솟구치는 때이므로, 책을 읽다 자신의 사상을 북돋울 실마리를 얻기도 한다. 시인이 술 마신 뒤에 착상을 얻는 것도 이 까닭이다. 평소보다 저자에게 깊이 공감하기도 하지만, 저자에게 반감을 품는 것도 이때다.
(三) 상중(喪中)은 우수와 비애의 때로, 정신이 침잠해 있다. 배민(排悶)을 위해 정신을 추스를 책을 골라 읽는 이가 많고, 같은 경지에 처한 사람이 쓴 것을 즐겨 읽는 이도 있다. 종교의 서가 대체로 이 경우에 어울린다. 근신 중이므로 평소 손에 들지 않던 난해한 서책도 펼쳐볼 마음이 생기지만, 가장 공감을 자아내는 것은 역시 비애의 책이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도 이 경우에는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된다. 아무 감흥 없이 읽어 넘겼던 것도 이 경우에는 절절히 마음에 사무친다. 고인의 유고를 꺼내어 완미하는 기회도 이때일 것이다. 고인을 추모하기에 이보다 좋은 때는 없다.
(四) 유수(幽囚)는 영어(囹圄)와 배소(配所)에서의 생활을 이른다. 일반 형사범으로 옥에 갇힌 경우는 물론 예외로 한다. 옥중 생활과 적거(謫居) 생활은 어떤 점에서 기려와 그 취향을 같이한다. 권속(眷屬)과 떨어져 고독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기려에는 없고 유수에 있는 것은 울분의 정이 격렬하다는 점이다. 이 격렬한 정을 가라앉히는 것도 독서요, 한층 고양하는 것도 또한 독서다. 무어라 해도 서책 외에는 벗이 없고, 무료를 달래 줄 것도 이 밖에는 없다. 고인의 책을 읽어 보탬을 얻는 것은 바로 이때다. 울분의 나머지 서책을 나쁜 데 쓰는 예도 있으나, 잘 활용하면 수양을 쌓고 인격을 기르는 양식이 된다. 예로부터 적거 중에 훌륭한 학자가 된 이가 적지 않고, 인격을 높인 이도 적지 않다. 울분의 나머지 써낸 문장이나 시편으로 불후의 명예를 얻은 예 또한 많다. 요컨대 유수 중의 독서만큼 몸에 보탬이 되는 것은 없다 하겠다.
(五) 진중(陣中)의 독서는 사활의 경계에 서서 하는 독서다. 탄환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는 독서할 겨를이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농성(籠城)이나 변방의 수자리에서는, 위험이 있다 해도 독서의 여지가 없지 않다. 많은 경우 병서(兵書)를 강독하고 군기(軍機)·군략(軍略)의 서를 읽는다. 실전에 임하여 이런 종류의 책을 읽고 아울러 연구하는 것만큼 득실을 절실히 느끼는 일은 없다. 반드시 병서·군적(軍籍)에만 한정될 것도 없다. 보국충군(報國忠君)의 사상을 고취하는 것으로는 역사도 있고 인호전(人豪傳)도 있으며, “정헌유언(靖獻遺言)” 류의 문편도 있다. 이런 도서는 진중에서 읽어 가장 깊은 감흥을 느끼는 것이어서, 무인적 수양은 대개 진중의 독서에서 비롯된다 해도 결코 터무니없는 말은 아닐 것이다.
(六) 병욕(病蓐)도 또한 독서의 한 경지다. 고통이 따르는 질환이나 열로 괴로운 병은 예외이지만, 그렇지 않은 환자로서 오래 와욕(臥蓐)을 강요받는 경우에 위안이 되고 소민(消悶)의 방편이 되는 것은 오직 독서뿐이다. 평소 분주한 사람은 이런 기회가 아니면 서책에 친숙할 틈이 없다. 그리하여 이런 사람 중에는 병중을 낙천지(樂天地)로 여겨 오히려 반기는 이도 있다. 병중에는 접객의 번거로움도 없고 청한(淸閑)을 방해하는 것도 전혀 없으므로, 기려 이상으로 독서에 탐닉할 수 있다. 정신이 침정(沈靜)하여 자연히 주관적이 되어 있으므로, 고요히 생각하고 숙고도 할 수 있어 그만큼 독서를 통해 받아들이는 것도 많다. 독서가(讀書家)는 때로 가벼운 미환(微患)에라도 걸려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조차 있다.
(七) 승원(僧院)은 일종의 청적(淸寂)한 경지다. 불상을 배례하고 향내를 맡으며 범종 소리를 듣는 곳에는 저절로 초탈(超脫)의 취향이 배어 있다. 당우(堂宇)가 높고 넓으며 수목은 울창하고, 시진(市塵)에서 멀리 떨어져 속된 소리가 끊겨 있으니, 독서에는 이 경지가 가장 적합하다. 예로부터 많은 현철(賢哲)이 승원에서 배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전(聖典)을 읽고 선학(禪學)을 닦으며 철리(哲理)를 강구하기에 이보다 어울리는 곳은 없겠지만, 반드시 철학 연구만의 전장(擅場)으로 삼을 것도 없다. 세속과 동떨어진 갖가지 서책을 마음 가는 대로 읽기에도 이 경지는 넉넉히 적합하다.
(八) 임천(林泉)도 또한 독서의 한 경지다.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이나 숲에서 시진을 피해 소박한 초암(草庵)을 맺기도 하고, 혹은 사치스러울 만큼 풍광이 빼어난 별장 같은 것도 모두 이 경지에 속한다. 여유로운 기분으로 독서하기에는 이런 곳이어야 한다. 아침저녁 접객에 시달리고 교제로 하루해가 모자란 바쁜 사람이 조용히 독서에 친숙할 수 있는 데는 이 경지가 가장 적합하다. 온천장을 독서처로 삼는 것도, 산해의 여관을 임시 거처로 삼아 여름에 더위를 피하면서 독서삼매(讀書三昧)에 드는 것도 다 같은 이야기다. 연속적으로 책을 읽어야 할 때, 저술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할 때는 누구나 임천의 경지를 좋아한다. 청한함 외에 정신을 기르는 자연미의 환경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승원 생활과 닮았으나, 부류는 다르다.
이상 팔경 외에도 아직 여러 가지 경지가 있다. 달빛 아래 책을 읽기도 하고, 반딧불이나 눈빛으로 책을 읽기도 하며, 이웃집 등불을 벽을 뚫어 빌려 독서하기도 한다. 혹은 뒷간에서 책 읽는 버릇이 있는 사람도 있다. 어떤 병에 걸려 뒷간에 오래 있을 수밖에 없는 이들 중에는 특별히 독서대를 마련하는 예도 있다. 서양에서는 욕조용 서적(bath book)이라는 일종의 책도 생겨나, 욕조에 몸을 담그면서 독서하는 풍습도 있다. 낚싯대를 드리우면서 하는 독서도 있고, 옛날에는 맷돌을 돌리면서 하는 독서도 있었다. 남의 하인이 되어 주인을 수행하면서 대기 시간에 독서하기도 하고, 낙타나 소나 말에 올라타면서 하는 독서도 있어, 헤아려 보면 갖가지다. 그 경지가 다르면 독서의 맛도 저절로 다르다. 특히 촌음(寸陰)을 아끼는 데서 비롯된 독서는 노력가가 하는 바로, 이런 고학(苦學)을 형설(螢雪) 두 글자로 형용하거니와, 의외로 궁핍 속의 독서는 의식(衣食)이 풍족한 사람이 알지 못하는 수확이 많다. 따라서 이런 경지의 독서는 결코 소홀히 여길 것이 아니지만, 다소 예외적인 경우이므로 팔경 밖에 두기로 하였다.
각필(閣筆)에 임하여 중국인의 독서를 칭송한 시 한 편을 게재한다.
富家不用買良田。書中自在千鍾粟。 (부가불용매양전. 서중자재천종속.) 집안을 부유하게 하려 좋은 전답 살 필요 없으니, 책 속에 저절로 천 곡의 양식이 있도다. 安居不用架高堂。書中自在黄金屋。 (안거불용가고당. 서중자재황금옥.) 편안히 살고 싶어 높은 집 지을 필요 없으니, 책 속에 저절로 황금 저택이 있도다. 出門莫恨無人随。書中車馬多如簇。 (출문막한무인수. 서중거마다여족.) 문 나설 때 따르는 이 없음을 한탄 말라, 책 속의 거마(車馬)는 떼를 이루듯 많도다. 娶妻莫恨無良媒。書中有女顔如玉。(下略) (취처막한무양매. 서중유녀안여옥. 하략.) 아내 맞이할 때 좋은 중매 없음을 한탄 말라, 책 속에 옥 같은 얼굴의 여인이 있도다.(하략)
이 시의 말과 같다면, 독서로 얻지 못할 것이 없다. 처자·진보(珍寶)·부귀·이달(利達), 모두 책 속에 있으니, 독서는 곧 만능이다. 이 시의 뜻을 마음으로 삼는다면, 독서만큼 즐거운 것은 없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