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쇼와 33년(1958) 12월
집이 없는 나는 서른 안팎이던 시절 야나카(谷中)에 있는 신뇨인(真如院)이라는 절에 임시로 머물렀다. 그 무렵 우에노(上野) 공원에서 야나카 묘지에 걸쳐서는 수천 그루는 됨직한 묵은 삼나무들이 하늘을 찌르며 무리 지어 솟아 있었고, 그 밖에도 메밀잣밤나무, 떡갈나무, 감탕나무, 육계나무 같은 오래된 활엽수들이 곳곳에 우거져 있었던 까닭에 한낮에도 어슴푸레 어둑하니 고즈넉하여 자못 내게 어울리는 곳이었다. 게다가 신뇨인을 비롯해 그 일대에 모여 있는 간에이지(寛永寺)의 말사들은 거의 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탓에 참배객도 장례도 없어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신뇨인도 기슈 가문(紀州家)의 위패를 모셔 두고 있을 뿐이라 백중·세밑(?) 무렵에 잠시 참배가 있을 뿐이었고, 주지 스님은 다이시도(大師堂)에 진을 치고 가끔 돌아올 따름이고, 동자승은 학교에 가 있고, 그 나머지는 절일을 보살피는 영감과 나뿐이었다.
육중한 산문(山門)을 들어서면 정면 현관까지 스무 간(間, 약 36미터) 남짓한 돌길이 깔려 있고, 현관에서 두 칸 방을 지나 툇마루를 세 번 꺾어 본당 앞을 한참 지나간 막다른 곳에 자리한 여섯 첩짜리 별채가 내 방이었다. 북쪽으로는 하키다시 창(掃き出し窓, 바닥까지 내려와 정원으로 통하는 큰 창)이 나 있어 장지문을 열면 이끼가 곱게 깔린 안뜰이 보이고, 한산죽(寒山竹) 한 무더기가 우거져 있었다. 남쪽은 사목(四日垣, 사각으로 짠 대울타리)으로 둘러친 좁은 마당이 되어 맹종죽(孟宗竹) 그늘 아래에 나무 등롱(燈籠) 하나. 어둑어둑해질 무렵이면 잠자러 오는 비둘기 한 마리. 햇살이 잘 들지 않아 겨울이면 사무치게 추운 대신 책을 읽거나 사색에 잠기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수필 「맹종죽 그늘(孟宗の蔭)」은 이곳에서 쓴 것이다. 그곳에 틀어박힌 나는 산문을 경계로 세상과의 교섭을 되도록 끊고, 형편 따라서는 승적(僧籍)에라도 들어갈 만한 마음이었으나 끝내 거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그만큼 나는 속세의 어지러움에 시달렸던 것이다. 은거의 은거다움은 도리어 번뇌가 치성(熾盛)한 젊은 시절에 있는 법이다. 거기에는 속세의 살이와의 사이에 명암흑백(明暗黑白)의 분명한 가름이 생긴다. 지금처럼 일흔 몇을 넘기고 보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 자체가 이미 절반은 은거인 셈이다.
자, 이제 독기(獨碁) 이야기로. 그러한 은둔 고독한 살림 가운데 나는 이따금 바둑돌을 두며 즐기는 일이 있었다. 더욱이 수정처럼 차갑게 맑아진 겨울이야말로 독기의 좋은 철이다. 바둑은 선중지속(仙中之俗)이라 했으니, 이는 풋바둑이 아무리 단순히 오락으로 두는 것이라 한들 반상(盤上)의 이해와 승부를 모른 체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독기는 그 「속(俗)」을 떨쳐 버리게 한다. 한 수 한 수의 득실과 종국(終局)의 승부를 잊고서야 바둑이 성립할 리 없지만, 옛 명국(古碁名局)을 두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 자신의 득실도 아니요, 적수와의 승부도 아니다. 제삼자로서 바라보는 반상에 놓인 돌 배치의 이해이며, 승패에 지나지 않는다. 명예와 가록(家祿)을 걸고 피를 보듯 다투는 쟁기(爭碁)도 흥겨운 오로(烏鷺)의 싸움이 된다. 더구나 번갈아 두는 흑백 한 점 한 점은 내 부끄러운 속수(俗手)·범수(凡手)가 아니라 혼인보(本因坊)의, 이노우에 인세키(井上因碩)의 그것이다. 거기에 독기만의 청징함, 마음 편함, 그리고 기이하리만치 깊은 맛이 있다. 나는 우선 검은 돌을 오른쪽 손끝에 집어 짤깍 하고 첫 한 점을 둔다. 말하자면 억만천만의 별 가운데 아름다이 가장 앞서 광휘를 발하는 저녁의 개밥바라기다. 다만 이는 바둑판의 경위도(經緯度) 위에 칠흑의 윤기를 발한다. 옛적 어느 학식 깊은 기성(棋聖)은 그 시절의 천문학(?)을 하계(下界)의 반상으로 끌어내려 첫 한 점을 이른바 천원(天元)에 놓았다고 한다. 그는 비범했기에 잘못을 범하고, 비범했기에 자타가 함께 그 잘못을 깨닫는 데 시간이 걸렸다. 자, 다음으로 내가 두는 두 번째 돌은 이미 잇따라 줄지어 나타나는 흰빛의 둘째 별이 아니다. 그것은 보통 첫 한 점과는 멀리 떨어진 바둑판의 다른 귀퉁이에 놓일지라도 멀리서 첫 한 점을 노려보면서, 우리 같은 범수로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전략적 이유에 따라 반석같이 흔들림 없이 자리하는 것이다. 이어서 마치 별자리와 그것을 이루는 낱낱의 별에 저마다 이름이 있듯, 크게는 정석(定石), 포석(布石), 잘게는 작은 게이마 시마리(小桂馬しまり), 큰 게이마 시마리(大桂馬しまり), 한 칸 높은 걸침(一間高がかり), 두 칸 높은 걸침(二間高がかり) 등, 등, 무수한 이름으로 불리는 그때그때의 이해득실을 헤아려 갖가지 모양으로 서로의 돌이 놓인다. 그 돌과 돌, 흑백의 돌 사이에마저 신비로운, 미묘한, 어떤 때는 철사처럼 굳센, 어떤 때는 금실처럼 아름다운, 또 어떤 때는 실처럼 가냘픈, 한편 그 형상도 어떤 때는 누벽(壘壁)처럼 견고한, 또 어떤 때는 나무 울타리 같은 무름을 떠올리게 하는 등 갖가지 맛과 정취를 자아낸다. 나는 손끝에 돌의 차가움, 매끄러움, 단단함, 약간의 무게를 느끼면서 어떤 때는 약하게, 어떤 때는 세게 반상에 두어 내린다. 가슴이 후련해지는 소리, 튀어 오르는 울림. 그리고 이따금 식은 손가락을 곁의 화롯불에 쪼인다. 단단히 다져진 사쿠라즈미(佐倉炭), 속에서 환히 빛나는 불기운, 키치키치 하고 갈라지는 소리, 타오르는 가스 불꽃의 빛, 그 위에는 난부(南部) 무쇠 주전자가 거무칙칙하게 얹혀 있다. 그것은 머지않아 귓전에 듣기 좋은 솔바람 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나는 대개 한 판으로 바둑통(碁笥)을 닫는다. 여러 판을 잇따라 둠으로써 옛사람의 명국이 범수의 머릿속에서 뒤엉켜 그 풍취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독기 두는 날 조릿대에 가루눈 쌓여 가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