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약용 · Korea
다산 정약용이 1818년 강진 유배지에서 완성한 『목민심서』 48권 가운데 「율기(律己, 자기 몸을 다스림)」 편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한 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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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이 1818년 강진 유배지에서 완성한 『목민심서』 48권 가운데 「율기(律己, 자기 몸을 다스림)」 편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한 판본. 한문 원본 6조(칙궁·청심·제가·병객·절용·낙시) 가운데 첫째 칙궁과 마지막 낙시 두 편을 6 chapter 33 paragraphs로 발췌한다. 한자 어휘는 처음 나올 때 ( ) 안에 자연체로 부연하고, 옛 한문 평결문체는 풀어 쓴 한국어 자연체로 옮겼다. 한문 원본판(P024534)과 단락 번호 일대일 매칭으로 함께 읽기에 맞다.
정약용 · Korea
다산 정약용이 1818년 강진 유배지에서 완성한 『목민심서』 48권 가운데 「율기(律己, 자기 몸을 다스림)」 편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한 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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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처에 절도가 있고 의관과 띠가 단정하며 백성을 다스리되 장중함으로 임하는 것은 옛 도(道)이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 등불을 밝히고 세수를 하며, 옷을 가다듬고 띠를 매며, 조용히 단정하게 앉아 신기(神氣)를 함양한다. 잠시 뒤에 곧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 오늘 행해야 할 일을 가려서 먼저 그 선후(先後)와 차례를 정한다. 먼저 어느 첩문(牒文)을 처결하고, 다음에 어느 영(令)을 내릴지를 모두 마음속에 또렷이 두며, 그 첫째 건을 가지고 그 잘 처결할 길을 생각하고 다음 둘째 건을 가지고 또 그 잘 처결할 길을 생각한다. 힘써 사욕(私欲)을 끊고 오로지 천리(天理)를 따른다. 해뜨기 전에 등불을 끄고 한결같이 단정하게 앉는다. 날이 밝아 시중드는 종이 시각이 되었음을 고하면(이미 부임편에서 보였다) 곧 창을 열고 참알(參謁, 아침 인사)을 받는다. 검은 베로 만든 갓은 본디 길에서 햇볕을 가리는 것이라 평상복도 아니고 더구나 공복(公服)도 아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마땅히 늘 오사모(烏紗帽)에 푸른 창의(敞衣)를 입어야 한다. 지금 경관(京官)으로 입직한 자가 모두 그러한데 외관(外官)이 어찌 홀로 그렇지 않을 것인가. 큰 좌기(坐起)가 있는 날에는 마땅히 단령포(團領袍)에 정대(鞓帶)와 검은 신을 갖추고 의자에 앉아 알현을 받는다. 무사(武事)로 인해 큰 좌기가 있을 때는 마땅히 융복(戎服)을 갖추고 호수립(虎鬚笠)과 사첩리(紗帖裏)에 검을 차야 한다. 더러 활달함을 즐기고 구속됨을 싫어하여 종건(騣巾)에 협수의(夾袖衣)만 입거나, 망건도 안 쓰고 버선도 안 신은 채 이민(吏民)에게 임하는 자가 있는데 크게 옳지 못하다. 《시경》에 이르기를 「위엄 있고 위엄 있는 위의(威儀)는 오직 덕의 모퉁이다」 하였고, 또 「위의를 공경하고 삼가니 백성의 본보기가 되라」 하였으니, 옛 도가 이러하다. 위의가 한 번 어그러지면 백성이 본받을 바를 잃어 무엇으로 다스림을 이루겠는가. 저녁에 관아(官衙)를 파할 때는 가을·겨울에는 늦게, 봄·여름에는 일찍 함이 마땅하다(이미 부임편에서 보였다). 호대초(胡大初)는 말하기를, 「하루의 일은 인시(寅時, 새벽 3~5시)에 있다. 오늘 어떤 일을 결단해야 하고, 어떤 첩문을 보고해야 하며, 어떤 부세(賦稅)와 어떤 색목(色目)을 분별해야 하며, 가두어 두었던 어느 사람을 풀어 주어야 할 것인지를 때때로 살피고 부지런히 행하라」 하였다. 여공저(呂公著)는 군수가 되어 늘 새벽 다섯 점에 일어나 등불을 잡고 안독(案牘, 공문서)을 살피고, 새벽이 되면 청(廳)에 나가 백성의 송사를 결단하였다. 물러나서는 편한 자리에 앉아 한가히 거처하기를 재계하듯이 하였고, 빈객과 동료들이 찾아오는 것은 시각에 구애하지 않았다. 그 까닭에 군에는 묵은 일이 없고 아랫사람의 사정이 위에 통하였다. 무릇 여섯 군을 다스리는 동안 이를 늘 그렇게 하였다. 당(唐)의 배요경(裵耀卿)이 다스리던 근정청(勤政廳) 앞에 큰 오동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새벽이 되면 새 떼가 날아 모여들었다. 이를 출청(出廳)할 때를 알리는 신호로 삼아 「보효조(報曉鳥, 새벽을 알리는 새)」라 불렀고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한지(韓祉)가 감사(監司)가 되어, 날이 새기 전에 세수를 하고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자리에 나가 앉되, 좌측에 베개나 안석이나 게으른 책상을 두지 않았다. 몸을 곧추 세우고 발꿈치를 모으고 두 손을 모아 앉아 종일토록 한 번도 기울거나 흔들리지 않았으며, 창살에 한 번도 기대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삼 년을 지낸 자가 한 번도 그가 피곤하여 하품하거나 기지개 켜는 모습을 본 일이 없다 한다. 늦은 식사를 마치면 늘 뒤뜰을 거니는데 그 돌아 도는 모양이 곧은 자처럼 분명하여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다.
공무에 여가가 있거든 반드시 정신을 모으고 생각을 가다듬어 백성을 편안케 할 방책을 헤아리고, 지극한 정성으로 좋은 길을 찾아야 한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오제공(吳濟公)이 이르기를, 매일 사물에 응접하는 가운데 한 시진(時辰, 두 시간)이라도 고요함을 얻어 영위(榮衛)의 정신을 길러야 한다. 일이 번거로울수록 마음이 더 한가하게 하고, 저쪽이 부족할수록 내 쪽은 여유 있게 해야 한다. 이 말이 비록 이단의 설(說)에서 나왔으나 시험해 보매 자못 효험이 있다. 어찌 주자(周子, 주돈이)가 말한 「주신(主神)」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정백자(程伯子)가 현(縣)을 다스릴 때 좌우(座右)에 「시민여상(視民如傷, 백성 보기를 다친 사람 보듯)」 네 글자를 써 놓고 「나는 매일 이 말씀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하였다. 양귀산(楊龜山)이 말하기를, 「그 마음 쓰는 바를 보매 응당 한 가지 일도 그릇됨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주자가 일찍이 요덕명(廖德明)을 조사단(趙師端)에게 천거하면서 말하기를, 「만약 이 사람을 동료로 얻는다면 반드시 백성을 다친 사람 보듯이 할 것이다」 하였다.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내가 남이 나에게 가하기를 원하지 않는 바를 나도 또한 남에게 가함이 없고자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서(恕, 미루어 헤아리는 어진 마음)다. 성인도 오히려 능치 못하다 하셨거든 하물며 배우는 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평소 일에 응하고 사람을 접하는 사이에 늘 마음에 이 「서」 한 글자를 두도록 가르쳐야 한다. 또 이르기를, 「오늘날 풍속에서 발 아래 횡재(橫財)를 마다할 줄 알면 큰 사람이라 하지만, 이른바 횡재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세상에서 의(義)와 이(利)의 분별이 가장 말하기 어렵다」 하였다. 살피건대 우리 유자(儒者)의 도(道)는 동(動)과 정(靜)을 아울러 닦아 본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그러나 관(官)에 있어 일을 처리하는 때에 더러 석가(釋家)의 설을 듣는 것이 마음을 맑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또한 해롭지 않다. 옛날 어진 목민관(牧民官)으로 정사에 부지런한 자들은 흔히 「시민여상(視民如傷)」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새겼다. 범문정공(范文正公)이 정사를 할 적에 항상 이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한다. 당의 한황(韓滉)이 윤주(潤州)를 다스릴 때 백성을 다친 사람 보듯이 하여 일마다 반드시 친히 결단하였다. 송의 진희량(陳希亮)도 평생 임지마다 그처럼 부지런하게 정사를 보았다.
말을 많이 하지 말고, 갑작스레 노여워하지 말라.
백성 위에 선 자는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멈춤, 한마디 말과 한 번의 침묵을 아래에 있는 자들이 모두 엿보아 살피고 헤아린다. 방에서 문으로, 문에서 읍(邑)으로, 읍에서 네 경계에 이르고 한 길로 펴진다. 군자가 집에 있을 때에도 오히려 말을 삼가야 하거든 하물며 관(官)에 있어서랴. 시동(侍童)이 비록 어리고, 시노(侍奴)가 비록 어리석어 보여도 여러 해 관에 있어서 무쇠처럼 단련된 자들이라 모두 기민하고 약삭빠르며 엿보는 것이 귀신같다. 관문(官門)을 한 발만 나서면 시시콜콜 다 새어 나간다. 내가 십여 년 동안 시골 읍에서 객으로 살면서 그 정상(情狀)을 안다. 노문기(盧文紀)는 말하기를, 「언어를 삼가고 음식을 조절하며 시비(是非)를 적게 하면 일이 쉬워진다」 하였다. 황노직(黃魯直)은 말하기를, 「만 마디 말이 만 가지로 다 맞는다 한들 한 번 잠잠히 있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러나 말함과 침묵이 지나치면 또한 중화(中和)의 기운을 잃는다. 송사를 듣거나 사정을 살필 때, 말과 침묵이 각기 그 마땅함을 얻어야 한다. 소동파(蘇東坡)는 「한 뱃속 가득히 시의(時宜)에 맞지 않다」 하였고, 또 「입을 닫고 혀를 감추는 것이 몸을 편안케 하는 요체다」 하였으며, 또 「본성 가운데 기쁨과 노여움이 없어야 큰 데 쓸 수 있다」 하였다. 또 「희노애락이 아직 발(發)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節)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中)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和)는 천하의 통달한 도리다」 하였고, 또 「마음 자리가 넓고 크면 세상이 넓고, 마음 자리가 좁고 작으면 세상이 좁다」 하였다. 살피건대 노여움이 끼치는 해(害)는 그 거셈이 술과 색(色)보다 심하다. 대저 사람의 칠정(七情)인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은 모두 병(病)이다. 그러나 기쁨·슬픔·사랑·욕심은 그 발(發)함이 반드시 기쁠 만하고 슬플 만하고 사랑할 만하고 욕심낼 만한 일에 말미암으니 비록 지나치더라도 자취가 있다. 오직 노여움의 발함만은 더러 아무 단서 없이 일어나고, 더러 작은 일에 갑작스레 일어나며, 더러 술 깬 뒤·병이 심할 때·피로할 때·더위에 상했을 때·놀랐을 때 등 가지가지 모양으로 나타나 사물에 부딪쳐 사납게 폭발한다. 매사가 산처럼 커 보이고 한순간에 천지를 뒤흔든다. 그러다 일이 지나가 마음이 가라앉으면 스스로 후회하여 「아아, 내가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던가」 한다. 앞 세대의 이름난 유학자들이 다 중년에 노여움을 발하다가 비로소 이 까닭을 깨달아 날마다 부드럽고 너그러움을 법으로 삼았다.
아랫사람을 다스리되 너그러움으로써 하면 백성이 따르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위에 있어 너그럽지 못하고 예를 행하되 공경하지 못하면 내 무엇으로 그를 보겠는가」 하셨고, 또 「너그러우면 무리를 얻는다」 하셨다.
사람들이 늘 말하기를 「관에 있을 때는 사나움을 숭상함만 한 것이 없다」 하니, 이는 속된 말이다. 먼저 「맹(猛)」 한 글자를 가슴속에 두면 그 마음에 간직한 바가 이미 좋지 못한 것이니 어떻게 다스림을 이루겠는가. 죄가 있으면 죄로 다스리고 내가 형(刑)을 씀이 각기 그 죄에 합당하면 그뿐이다. 어찌 사나움을 숭상할 까닭이 있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너의 위의를 공경하라. 부드럽고 아름답지 않음이 없으라」 하였다. 「유가(柔嘉)」 두 글자는 그 기상이 가장 좋다. 내가 옛날 조정에 있을 때 공경과 대신들의 말과 안색을 보매 대체로 유가하였다. 후세 사람이 옛사람만 같지 못하다. 한위공(韓魏公)이 재상이 되어서 비록 큰일이라도 그것을 의논할 때 결코 빠른 말과 갑작스러운 안색을 짓지 않았다. 살피건대 유가(柔嘉)함은 인(仁)이 발현된 것이다. 대저 어진 자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유가하다. 사납고 모진 자는 본디 어질지 못한 데서 말미암는다. 어질지 못한 자는 비록 아비와 자식, 형제 사이라도 또한 부드러운 기운이 없다. 하물며 그 아래 백성에게랴. 이 장(章)은 「갑작스레 노여워하지 말라(毋暴怒)」 장과 합하여 보아야 한다.
관부(官府)의 체모(體貌, 격식과 위엄)는 엄숙함에 힘써야 한다. 앉아 있는 자리 곁에 다른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수령의 자리는 존엄(尊嚴)하다. 뭇 아전이 머리를 조아리고, 뭇 백성이 뜰에 서 있는데 감히 다른 사람이 그 곁에 끼어들 수 있겠는가. 비록 자제나 친한 빈객이라도 다 마땅히 물리쳐 홀로 우뚝 앉아 있는 것이 예(禮)에 맞는다. 더러 한낮에 공무를 마치고 물러앉아 있거나 고요한 밤에 일이 없을 때라야 비로소 그들을 맞아들일 수 있다. 어버이를 봉양하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 어버이 계신 곳에 나아가 문안하고, 그 뒤에야 나와 참알(參謁)을 받는다. 더러 부형(父兄)과 존장(尊長)이 안채에 계셔서 식사할 때라면 공무가 끝난 뒤 잠시 들어가 뵐 것이지, 부형이나 존장으로 하여금 정당(政堂)에 빙 둘러 앉게 해서는 안 된다. 채번(蔡樊)은 회안(淮安) 사람으로 성품이 엄숙하였다. 식사를 마치는 즉시 나가서 일을 보았고 자제와 빈객이 감히 청하는 바를 두지 못하였다. 정명도(程明道)가 부구현(扶溝縣)을 다스릴 때 정사를 함에 덕(德)으로 교화함을 힘쓰고 늘 얼굴빛을 거두고 단정하게 앉으니, 자제들이 모두 숙연(肅然)하였다.
군자(君子)가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없다. 백성 위에 선 자는 중후함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사안(謝安)은 위급한 소식 가운데서도 바둑을 멈추지 않았고, 유관(劉寬)은 국그릇이 엎질러져 무릎을 적셔도 놀라지 않았다. 모두 평일에 익히 헤아려 두었던 까닭에 일을 당하여 황망함을 면한 것이다. 관부 안에 더러 호랑이나 도적이 들거나, 수재(水災)나 화환(火患)이 나거나, 담이 무너지고 집이 무너지는 변고가 있거나, 더러 지네와 뱀이 깔개에 떨어지거나, 시중드는 아이가 어수룩하여 물을 엎지르고 화로를 뒤엎는 일이 있어도 모두 모름지기 의연(凝然)히 움직이지 말고 천천히 그 이치를 살펴야 한다. 더러 어사(御史)가 출도(出道, 암행감찰)를 하거나 폄(貶)하는 보고가 갑자기 이르더라도 더욱이 안색과 말투를 바꾸지 않아야 비웃음과 모욕을 면할 수 있다. 주박(朱博)이 상서(尙書)가 되어 큰 손님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두 손을 모아 단정하게 앉았으며, 손님이 하직할 때에도 천천히 일어났다. 살피건대 사람 위에 있는 자의 위망(威望)은 「지중(持重, 무겁게 지님)」 두 글자에 있다. 경박하고 조급한 것이 가장 큰 병통이다. 비록 작은 일이라도 또한 경솔하지 말고, 비록 큰일이라도 또한 황망하지 말아야 비로소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다. 무릇 일이 갑자기 닥쳤을 때 가장 꺼리는 것은 놀라고 두려워 안색을 잃는 것이다. 안색을 한 번 잃는 것이 보이면 위의(威儀)가 땅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이른바 「변(變)을 만나도 놀라지 않는다」는 것은 군자(君子)의 큰 단서이다. 주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거친 자는 일마다 거칠고, 마음이 세밀한 자는 일마다 세밀하다」 하시고, 또 「마음이 정해진 자라야 일을 잘 처리한다 말할 수 있다」 하셨다. 조청헌공(趙淸獻公)은 평소 일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여 앞뒤로 일흔여 차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일에 임해서는 의연하여 어지럽지 않았고, 비록 놀라운 변고가 갑자기 닥쳐도 안색을 잃지 않았다. 한위공(韓魏公)은 급한 보고를 받을 때마다 반드시 먼저 눈을 잠시 감았다가 천천히 보았다. 이것이 곧 자신을 기르는 공부요, 곧 성문(聖門)의 「주경(主敬, 공경함을 주로 함)」 공부이다. 정이천(程伊川)은 「공경을 주로 하면 기(氣)가 절로 안정된다」 하였고, 또 「하나에 주(主)하여 옮겨 가지 않음을 일러 경(敬)이라 한다」 하였다. 공경을 주로 하면 모든 일이 다 다스려진다.
술을 끊고 색(色)을 멀리하며, 음악과 풍악을 물리치고, 가지런하고 단정하며 엄숙하기를 큰 제사를 받들듯이 하라. 감히 한가로이 놀거나 거칠고 게으르게 굴어서는 안 된다.
정선(鄭瑄)이 말하기를, 「총명에는 한도가 있고 일의 기미는 끝이 없다. 한 정신을 다하여 뭇 간사함을 막는 것도 이미 쉽지 않은 일인데, 술잔을 머금어 즐기고 마음대로 색을 탐하며 시를 짓고 바둑을 두느라 마침내 옥송(獄訟)이 해를 넘기고 시비(是非)가 자리를 바꾸며 송사가 더욱 많아지고 일의 기미가 더욱 어수선해지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닭이 우는 새벽에 정사를 듣고 집안 일은 다 물리치되, 술과 색으로 스스로 곤(困)하게 하지 말고, 거친 즐거움으로 스스로 해치지 말 것이다. 어떤 일을 결단할 것인지, 어떤 첩문을 보고할 것인지, 어떤 부세(賦稅)를 분별할 것인지, 가두어 둔 누구를 풀어 줄 것인지를 때때로 살펴 부지런히 행하라」 하였다. 살피건대 술과 색의 해(害)는 옛날이나 이제나 같은 폐단이다. 그러나 색의 해는 술보다 더 심하다. 대저 술 취함은 하루만 지나면 깨지만, 색에 빠짐은 평생토록 곤한 데서 벗어나지 못한다. 목민관이 되어 한 번 창기(娼妓)에 발을 들이고 한 번 시골 부녀를 범하면 평생의 명절(名節)이 이미 떨어지고 만사가 다 무너진다. 비록 겉으로는 오히려 위엄으로 누른다 해도 안으로 사정(私情)이 이미 통하면 송사 한 마디에 기백(氣魄)이 단번에 꺾이고 만다. 어찌 슬프지 않은가. 비록 그러나 옛날에 귀한 관리에게는 모두 첩잉(妾媵)이 있었으니 또한 예에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읍재(邑宰)가 되면 그 자체가 뭇 원성의 표적이 됨이 적지 않다. 또 색(色) 하나를 더하면 어떻게 그것을 감당하겠는가. 성악(聲樂)은 옛날에 백성을 다스리는 데 쓰는 그릇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풍류는 오로지 잔치와 놀이를 일로 삼아 북과 피리가 시끄럽고 가기(歌伎)가 자리에 가득하여 백성의 기름을 허비하기를 끝이 없으니, 성현(聖賢)의 도(道)에서 한참 어긋난다. 그러므로 지금의 목민관이 된 자는 일체 성악을 물리쳐야 옳다. 다만 아침의 정참(廷參)에 북과 나발은 예에 따라 거행하되, 나머지 잔치는 일체 물리쳐도 무방하다. 만일 상사(上司)의 행차가 오거나 큰 손님이 이르면 약간의 예로써 받들 것이요, 또한 화려하고 사치해서는 안 된다. 주박(朱博)이 기주(冀州) 자사가 되어 이르는 주현(州縣)마다 모두 성악을 물리쳤다.
잔치와 놀이의 즐김은 백성이 기뻐할 바가 아니니, 단정하게 거처하며 움직이지 않는 것만 못하다.
주박(朱博)은 앞뒤로 세 현(縣)을 다스렸으되 청렴하고 검소하여 술과 색·노는 잔치를 즐기지 않았다. 미천한 데서 부귀에 이르도록 음식에 두 가지 맛을 차리지 않았고, 상 위에 술잔이 세 잔을 넘지 않았으니 곧 「세 그릇을 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밤에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아내가 그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이급(李及)이 항주(杭州)를 다스릴 때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여 전당(錢塘)의 사치한 풍속을 미워하여 잔치를 일삼지 않았다. 당의 전휘(錢徽)가 강주(江州) 자사가 되었을 때 주에 「우전전(牛田錢, 농우 사들이는 돈)」 백만이 있어 자사들이 잔치와 손님 접대에 쓰곤 하였는데, 전휘는 「이는 농사 지을 채비이니 어찌 다른 곳에 쓸 수 있겠는가」 하고 그것을 두루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다스림이 이미 이루어지고 뭇 사람의 마음이 이미 즐거워진 뒤에야 풍류로 단장하고 백성과 더불어 함께 즐기는 것도 또한 앞 시대 어진 사람들의 성대한 일이었다.
동파(東坡, 소식)는 여항(餘杭)을 다스릴 때 서호(西湖)에 노닐 적마다, 흔히 정기(旌旗)와 따르는 무리를 시켜 전당문(錢塘門)을 나가게 하되, 자기는 용금문(湧金門)으로부터 두어 명 늙은 군병만을 데리고 배를 띄워 호수를 가로질러 건너왔다. 보안원(普安院)에서 밥을 먹고 영은사(靈隱寺)와 천축사(天竺寺) 사이를 한가로이 거닐 적에 아전의 문서를 가지고 다녔다. 냉천정(冷泉亭)에 이르러서는 책상에 기대어 결단을 내리며 붓을 내림이 비바람 같았고, 다투는 송사를 갈라 처결하기를 담소(談笑) 속에 마쳤다. 그러고는 동료들과 더불어 통쾌하게 마시고 늦은 저녁에 말을 타고 돌아오는데 길 양옆 등불 사이로 백성들이 태수(太守)를 마음껏 구경하였다. 어느 늙은 중이 그것을 읊어 「강산이 비록 좋아도 풍류는 여전히 있구나」 하였다. 살피건대 이것이 어찌 태평성대(昇平)의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다스림이 이미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행할 수 있다. 다스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먼저 잔치와 놀이를 일삼으면 백성의 한탄과 원망이 날로 더해 간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낙주(洛州)를 다스릴 때 휴가일(休暇日)이면 곧 한두 명 가동(家僮)에게 술 한 병을 메게 하여 산림에 노닐며 조용히 잔을 기울였다. 이것이 모두 군자(君子)의 일이다. 소동파가 서주(徐州)를 지킬 때 강물이 갑자기 불어 성이 무너지려 하자 동파가 지팡이를 잡고 노역을 독려하며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일이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백성과 더불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그것을 경하(慶賀)하였다. 이것이 또한 「백성과 더불어 즐긴다(與民同樂)」는 것이다.
수행하는 무리를 간소히 하고 그 얼굴빛을 따뜻이 하여 묻고 살피면 백성이 기뻐하지 않음이 없다.
고려의 서침(徐忱)은 울진현령(蔚珍縣令)이 되어 선정을 많이 베풀었다. 일찍이 소를 타고 농사를 권하였다. 박세량(朴世樑)이 신창현감(新昌縣監)이 되었을 때, 모든 일을 간소하게 하여 관아에 앉을 때도 북과 피리를 두지 않고 문을 나설 때도 조례(皁隷)를 거느리지 않았으며, 병이 아니면 두 가지 반찬을 차리지 않고 큰 더위가 아니면 일산(日傘)을 펴지 않았다. 농사철이 되면 아전과 군졸들에게 모두 농토로 돌아가게 하여 관아를 지키는 자가 겨우 두어 명이었다. 필요한 땔감과 짚은 동복(童僕)에게 가져오게 하였다. 휴가가 주어지면 짧은 두건에 평상복으로 지팡이를 짚고 한가로이 거닐었는데, 때로는 백성들이 그가 수령(守令)인 줄 알아보지 못하였다 한다. 유의(柳誼)가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어 의장(儀仗)을 물리치고 늘 야복(野服) 차림으로 마을을 드나들며 백성의 고통을 물었다.
정당(政堂)에 글 읽는 소리가 있다면 이를 일러 청사(淸士, 맑은 선비)라 할 수 있다.
임금은 만 가지 기무(機務)가 지극히 번거롭되 오히려 날마다 경연(經筵)에 임하려 하는 까닭은, 진실로 성현(聖賢)의 격언(格言)을 폐부(肺腑)에 적시어 정사로 펴 내면 그 유익이 절로 넓고 큼이 있기 때문이다. 공무에 여가가 있거든 마땅히 《상서(尙書)》·《노론(魯論, 논어)》·《중용》·《대학》 및 《송명신록(宋名臣錄)》·《자경편(自警編)》 따위의 책을 가져다 늘 외워 읽어야 한다. 유중영(柳仲郢)은 예(禮)로써 몸을 다스려 단정히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있었으며, 세 번이나 큰 진(鎭)을 다스렸으되 마구간에 좋은 말이 없고 옷에 향(香)을 쐬지 않았다. 공무를 마치고 물러나면 반드시 책을 읽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완평부원군 이상공 원익(完平李相公元翼)은 젊을 적에 일찍이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었고, 뒤에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나가서도 공무를 마치고 물러나면 반드시 《소학(小學)》을 읽었다.
만약 시(詩)나 읊고 바둑이나 두면서 정사(政事)를 아전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옳지 못하다.
성종(成宗) 때 유미계(兪㵢溪)인 호인(好仁)이 부모 봉양을 위해 청하여 산음현감(山陰縣監)이 되었다. 영남방백(嶺南方伯)이 임금에게 하직할 적에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친구 유호인이 산음(山陰)에 재임 중이니, 경(卿)은 그를 두돈(斗頓, 떠받쳐 도움)하라」 하셨다. 방백은 마침내 민은(民隱)을 돌보지 않고 시(詩)나 읊기를 그치지 않다가 파출(罷黜)되었다. 김남창(金南牕) 현성(玄成)이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다스리되 손을 깨끗이 하여 직(職)을 받들고 청렴한 명성을 세상에 떨쳤으나, 성품이 매우 소탈하고 우아하여 아전의 일에 익숙하지 않고 매질을 일삼지 않았다. 영재(鈴齋)에 담담히 앉아 종일토록 시를 읊으니, 호사가(好事家)들이 「김 아무개는 벼슬을 맡으매 종일토록 시만 읊는다」 하였다. 주자(朱子)께서 일찍이 「벼슬을 맡아 글 읽기를 좋아함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정사(政事)에도 마음을 두지 않을 수 없다」 하셨다.
전례(前例)를 따라 일을 줄이고 대체(大體)를 지키는 데 힘쓰는 것도 한 가지 방도이다. 다만 시절이 맑고 풍속이 순후하며 지위가 높고 명망이 중한 자라야 비로소 그렇게 할 수 있다.
육가(陸賈)는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정사를 함에 있어서는 혼연(渾然)히 일이 없고 적연(寂然)히 소리가 없어, 관부(官府)가 사람이 없는 듯하고 정락(亭落)이 아전이 없는 듯하다. 우(郵)에는 밤길 가는 졸병이 없고, 향(鄕)에는 밤에 부르는 징발(徵發)이 없으며, 노인은 당(堂)에서 단맛을 즐기고 장정 사내는 들에서 밭을 간다」 하였다. 살피건대, 한(漢)이 처음에 진(秦)의 가혹함을 이어 백성과 더불어 쉬게 하려고 하였으므로 그 논(論)이 대체로 이러하다. 평범한 사람이 이를 흠모하여 두 손을 모으고 잠잠히 있으면 만사가 무너지고 만다. 급암(汲黯)이 동해(東海) 태수가 되어 백성을 다스리되 청정(淸淨)함을 좋아하여, 승사(丞史)를 가려 그에게 일을 맡기고 자기는 큰 줄기만 책임지고 작은 일에는 가혹하지 않았다. 한 해 만에 동해가 크게 다스려졌다.
절약하되 흩어 베풀지 않으면 친척이 그를 등진다. 「낙시(樂施, 즐거이 베풂)」야말로 덕(德)을 심는 근본이다. 못 위에 물이 있어 머무르고 고이는 것은 장차 그것을 새어 흘려 만물을 적시려 함이다. 그러므로 능히 절약하는 자라야 능히 베풀 수 있고, 절약하지 못하는 자는 베풀지도 못한다. 기녀를 가까이하고 창기를 부르며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불며, 비단을 끌고 비단을 겹쳐 입고, 좋은 말에 새긴 안장을 얹고, 거기에 더하여 상관에게 아첨하여 섬기고 권귀(權貴)에게 뇌물을 보내어, 비용이 하루에 수만에 이르고 한 해 동안 천억을 헤프게 쓴다면 무엇으로 친척에까지 베풀겠는가. 「절용(節用)」이 「낙시」의 근본이라는 이 한마디를 모르면 안 된다.
가난한 벗과 곤궁한 친족은 그 힘을 헤아려 두루 돌보아야 한다. 한 집안 사람을 비록 다 데려와 살게 할 수는 없더라도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 식구를 헤아려 매달 양식을 이어 주지 않을 수 없다. 소공(小功) 안의 친족 중에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보름치 양식을 이어 주고, 그 나머지는 위급한 때만 도울 따름이다. 가난이 그리 심하지 않은 자에게는 때때로 선물을 보내라. 가난한 벗이 찾아와 청하는 자가 있거든 후하게 대접하되 그를 보낼 때에는 노자(路費)를 헤아려 보태어, 집에 돌아가는 날에 남는 것이 있도록 함이 옳다. 유관(劉寬)이 남양태수(南陽太守)가 되어 매달 받는 봉록(俸祿)을 가난한 친족에게 나누어 주매, 아내가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범순인(范純仁)이 제주(齊州)를 다스릴 때 흉년이 들매 곧 자기 월급을 줄여 가난한 자를 구휼하였다. 고개지(顧愷之)가 장사태수(長沙太守)가 되매 매달 받는 봉록의 나머지를 가난한 친족에게 나누어 주었다.
내 곳간에 남음이 있어야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다. 공물(公物)을 훔쳐 사사로운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만일 공채(公債)가 실로 많이 쌓여 있다면 마땅히 실정(實情)을 친지와 벗에게 두루 알려, 다소 여유가 생긴 뒤에야 와서 구하도록 하여라. 객기(客氣)로 호기를 부려 관(官)의 창고가 텅 비고 아전이 목매고 종이 달아나 한 경계에 해독(害毒)이 퍼지게 한다면, 「낙시(樂施)」를 덕(德)으로 삼을 수가 없다. 윤우(尹友)인 외심(畏心)은 그의 아우가 해남재(海南宰)가 되어 공채가 아직 많이 쌓여 있을 때, 형의 제수(祭需)를 보내자 형 윤우가 그것을 물리치고 받지 않으며 「아래에서 아전의 재물을 빼앗아 내 형의 제(祭)에 쓴다면 예가 아니다」 하였다.
관(官)의 봉록을 절약하여 그 고을 백성에게 돌려주고 집안의 곡식을 흩어 친척을 보태어 주면 원망함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늘 말하기를, 「벼슬에서 무엇이 즐거운가. 남는 것이 곧 집안 사사로움이 된다」 하니, 이는 자기 전장(田莊)의 소출을 집에 보내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팔아서 그것을 잉여(贏羨)로 삼아 비로소 전토(田土)를 더 넓히는 데 쓰겠다는 것이다.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양식을 적(敵)에게서 취하여 내 곡식을 허비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그 마음이 백성을 적(敵)으로 삼는 것이라 이런 꾀를 짠다. 어찌 종족(宗族)에게 나누어 주어 관(官)의 재물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음만 하겠는가. 그러므로 옛날의 어진 아전은 외직에 있을 때 비록 세 해, 다섯 해를 지내도 집안 살림이 처음과 같았다. 그 어진 자는 반드시 관의 봉록을 그 백성에게 돌려주고, 집안의 곡식으로 친척을 두루 돌보았다.
유배(流配)되어 옮겨 가는 사람이 나그네 길에 쪼들리고 곤궁할 때, 그를 가엾이 여겨 보태어 주는 것 또한 어진 사람의 힘쓸 바다. 방극근(方克勤)이 제녕부(濟寧府)를 다스릴 때, 명(明) 태조(太祖)가 법(法)을 엄하게 써서 사대부(士大夫)들이 많이 귀양 갔다. 제녕을 지나는 자가 있으면 극근이 곧 두루 그들을 돌보아 주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위태롭다 만류하였으나 그래도 그치지 않았다. 김영구(金永耇)가 전주판관(全州判官)이 되었을 때, 부처(付處) 이하 모든 죄수들에게 속금(贖金)을 받는 명령이 있었다. 판중추(判中樞) 김공 수(金公睟)가 만경(萬頃)에 적거(謫居)하며 가난하여 그것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공이 그 집안과 평소 친하던 터라 노비 일곱 식구와 한성(漢城) 집의 전답 열 섬짓을 내어 그 집의 가동(家僮)에게 부쳐 주었다. 이때 청명(淸名)이 세상에 가득하였다.
전란(戰亂)이 어지러워 떠돌아 머무는 사람들을 어루만져 살게 하는 것은 의로운 사람의 행할 바이다. 강수곤(姜秀崑)이 고창현감(高敞縣監)이 되었을 때, 바야흐로 군사(軍事)가 일어나는 즈음에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데까지 이르렀다. 공이 능히 계책을 마련하여 굶주린 자들을 진휼(賑恤)하였다. 양호(兩湖)의 유민(流民)이 천 수에 이르고, 북방(北方)의 친척과 친구로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객(客)이 되어 온 자가 또한 날마다 천 수에 가까웠다. 공이 몸소 박하게 먹으며 남에게 베풀어 천여 명을 살렸다. 홍이일(洪履一)이 대구판관(大丘判官)이 되었을 때, 병자(丙子)의 난(亂)을 당하였다. 대령(大嶺) 이남에는 병화(兵火)가 드물게 미쳐 피난한 사람이 마을에 가득하였다. 공이 몸소 두루 돌보아 살린 자가 매우 많았다.
권문(權門)과 세가(勢家)는 후하게 섬길 수 없다. 권문에 보내는 헌물(獻物)은 후할 수 없다. 내가 받은 은혜가 있거나 의지하여 친하게 지내는 자에게 때때로 보내는 선물이라야 음식 두어 가지에 지나지 않게 하고, 그 밖에 담비 가죽·인삼·비단 따위 보배로운 물건은 결단코 바칠 수 없다. 어째서인가. 재상(宰相) 가운데 청렴하고 밝아 식견 있는 자는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나를 비루하고 아첨하는 사람으로 여겨 더러는 임금 앞에 들어가 고하여 벌(罰)을 내리기를 청한다. 이것은 재물을 잃고 몸을 망치는 위태로운 길이다. 만일 그 재상이 사사로운 선물을 즐겨 받는 자라면 반드시 어진 자가 아니니, 뒷날 죄를 얻고 녹(祿)이 떨어지는 일이 모두 그 사귐에서 말미암는다. 내가 바친 것이 도리어 스스로 화(禍)를 부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옛날의 어진 아전은 권문과 세가에 대하여 글을 닦아 문안을 드릴 뿐, 감히 무거운 물건을 보내지 않았다. 그 가운데 헌물을 보내는 경우라도 반드시 청렴하고 밝으며 내가 은혜를 받은 이를 가려, 때마다 작은 선물을 보내되 종이만큼 가볍고 박하게 하고, 음식 따위에 그치게 하였다. 그 밖에 보배로운 물건은 결단코 그 문(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방참(龐參)이 한양태수(漢陽太守)가 되었을 때 비록 권문에서 보내오는 선물이라도 모두 응하여 받지 않았다. 포효숙(包孝肅, 포증)이 변군(邊郡)에 있을 때 매번 아전을 시켜 절기(節氣)에 예의로 보내는 선물을 가지고 대장군가(大將軍家)에 보냈으되 음식 두어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Catatan Editor Pagera
다산 정약용이 1818년 강진 유배지에서 완성한 『목민심서』 48권 가운데 「율기(律己, 자기 몸을 다스림)」 편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한 판본. 한문 원본 6조(칙궁·청심·제가·병객·절용·낙시) 가운데 첫째 칙궁과 마지막 낙시 두 편을 6 chapter 33 paragraphs로 발췌한다. 한자 어휘는 처음 나올 때 ( ) 안에 자연체로 부연하고, 옛 한문 평결문체는 풀어 쓴 한국어 자연체로 옮겼다. 한문 원본판(P024534)과 단락 번호 일대일 매칭으로 함께 읽기에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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