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가이드 · 2026-05-06 · 읽는 시간 ~ 7분
명인전(名人伝) — 활을 쏘지 않는 명궁의 이야기
나카지마 아쓰시가 列子 우화에서 가져온 「명인전」 한국어 번역으로 읽기. 기창·비위·감승 세 명궁의 계보와 「지위무위(至為無爲)」가 도달하는 자리.
Pagera Editorial
활쏘기로 천하제일이 되려는 사내가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 활을 잡지 않습니다. 잡을 필요조차 없게 됩니다. 나카지마 아쓰시의 「명인전(名人伝)」은 이 한 행로에 列子(열자)의 노장(老莊) 사상을 압축해 담았습니다.
출전 — 列子 「황제(黄帝)」편
「명인전」은 나카지마 아쓰시(中島敦, 1909~1942)가 1942년에 발표한 단편입니다. 「산월기」 「제자」와 함께 그의 대표작 목록에 들어갑니다. 출전은 『列子』 황제편의 짧은 우화 — 기창(紀昌)과 그의 스승 비위(飛衞), 그리고 산속의 진정한 명궁 감승(甘蠅)이 등장합니다. 나카지마는 짧은 원전을 가져와 인물 동선과 심리, 시간의 흐름을 보태 한 편의 완결된 산문으로 다시 썼습니다.
플롯 — 세 단계의 수련
주인공 기창은 趙(조)나라 한단(邯鄲) 사람. 천하제일의 명궁이 되겠다는 뜻을 품고 당대의 명궁 비위를 찾아갑니다. 비위는 기창에게 두 가지 기초 훈련을 시킵니다.
- 눈을 깜빡이지 않는 법 — 아내의 베틀 아래 누워 북이 코앞을 스쳐도 눈을 깜빡이지 않을 때까지 2년.
- 작은 것을 크게 보는 법 — 이를 머리카락에 매달아 창가에 두고 매일 본다. 3년 뒤 이가 수레바퀴만 하게 보일 때까지.
훈련을 마치고 활을 잡자, 기창의 화살은 빗나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 —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스승 비위만 사라지면 천하제일은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 들과 산에서 기창과 비위는 서로 활을 겨눕니다. 그러나 둘 다 신묘한 솜씨로 모든 화살을 받아냅니다. 결투는 끝나지 않습니다.
이 결투를 풀어주는 것이 비위의 한마디입니다. 「내 위에 진짜 명궁이 있다. 곽산(藿山)의 감승. 그를 만나야 너는 정말 알게 된다.」
곽산의 감승 — 활을 잡지 않는 활쏘기
기창은 곽산을 오릅니다. 거기서 만난 노인 감승은 — 활을 들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활을 쏘는 것을 보여달라」는 기창의 청에 노인은 빈 손으로 시위를 당기는 시늉을 합니다. 그 순간 하늘에 날던 솔개가 떨어집니다. 기창은 이 광경을 보고 비로소 자신의 솜씨가 활(불완전한 도구)에 의지한 솜씨였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列子가 말한 「지위무위(至為無爲)」, 「지사무사(至射無射)」 — 지극한 행위는 무위에 이르고, 지극한 활쏘기는 활을 쏘지 않음에 이른다 — 의 우화화입니다.
9년 동안의 침묵, 그리고 결말
기창은 곽산에서 9년을 머문 뒤 한단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는 — 활을 잡지 않습니다. 활을 잡기는커녕, 활이 무엇인지조차 잊은 듯합니다. 어느 날 친구 집에 갔다가 활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묻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며,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친구들은 이 한마디에 충격을 받습니다. 천하제일의 명궁이 마침내 활을 잊었다. 한단의 화공·악공·공장(工匠)들은 그날부터 자신의 도구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고 — 나카지마는 결구에 이 한 줄을 더합니다. 잊음(망각)이야말로 명인의 도달점이라는 노장의 메시지가 한단의 거리에 절제된 카타르시스로 퍼집니다.
왜 「명인전」을 지금 읽는가
「산월기」가 자기 분석의 텍스트라면 「명인전」은 그 반대편 — 자기를 잊는 텍스트입니다. 두 작품을 같은 1942년에,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호랑이가 된 이징(자신을 너무 의식한 자)과, 활을 잊은 기창(자신을 모두 비운 자) — 나카지마는 같은 해에 양극단의 인간상을 한문조 격조로 그렸습니다.
한국 독자에게 「명인전」은 두 겹으로 흥미롭습니다. 첫 겹은 列子라는 동아시아 공통 텍스트를 일본 근대 작가가 어떻게 다시 썼는가. 둘째 겹은 「잘하는 것」과 「최고가 되는 것」 사이의 거리를 한 노인의 빈 손이 어떻게 보여주는가. 6,000자 남짓한 짧은 글이지만 한 번 읽고 잊히지 않는 우화입니다.
번역의 어려움
「명인전」 번역에서 가장 까다로운 것은 한자 어휘의 격조 보존입니다. 「夫子(부자)」 — 「선생님」으로 약화하면 列子의 옛 격조가 사라집니다. 「壁立千仭(벽립천인)」 — 깎아지른 절벽의 높이. 「掉尾(도미)」 — 마지막을 휘두른다는 사자성어. Pagera 한국어 번역본은 한자병기 + 율조 풀이 방식으로 옛 격조와 현대 가독성을 동시에 잡았습니다.
Pagera에서 「명인전」 한국어 번역본을 바로 읽어보세요.